EBS SPACE는 요즘 제9회 EBS국제다큐영화제로 종일 관람객과 영화인들을 맞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다큐영화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데요.
지난 8월 19일에는 총 1억 1,000만 원의 제작 지원금을 놓고
장편 다큐멘터리 그리고 단편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열띤 피칭이 있었습니다.
저는 기존에 장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본 경험이 있는 감독들이 경쟁하는, 장편 피칭 현장에 다녀왔어요.
여기서, 피칭(Pitching)이란 일종의 '작품 제작 계획 발표'인데요. 심사위원들이 이것을 듣고 지원작을 결정합니다.
올해는 총 4편의 다큐멘터리에 장편 7,000만원 3,000만원, 단편에는 500만원의 지원금이 지원될 예정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오랜만에 피칭이라는 용어를 들으니까
학교 다닐 때 첫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좌충우돌 고생했던 기억이 하나 둘 떠올랐어요.
심사위원으로는 총 5분이 수고해주셨는데요.
왼쪽부터 박봉남 다큐멘터리 감독, 김진만 MBC 다큐멘터리 PD, 권혁미 EBS 글로벌콘텐츠부 차장,
그리고 영국 모자이크 필름의 대표 및 DFG 설립자인 앤디 글린 감독,
마지막으로 핀란드 공영방송 YLE 다큐멘터리 이카 베칼라히티 커미셔닝 에디터 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눈물 시리즈인 <아마존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 시리즈를 만든 김진만 PD가 제일 반가웠습니다.
영어와 한국어가 함께 사용되어서 통역기를 사용해야 했는데요.
그래서 뒤쪽 부스에 동시통역사 2분이 번갈아 가면서 통역을 해주시더라고요.
신지승 감독
<영화와 마을>이라는 작품으로 첫 피칭을 하셨는데요.
다큐와 영화가 가진 모든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인 작품을 구상하고 계셨어요.
세 군데의 마을에서 마을의 주민들이 다큐 제작에 함께 참여하고 연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여
제작자와 (영화 속) 인물의 구분이 모호하게, 평등한 창작자로 만나고
스토리는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 에피소드를 그대로 담는 축제로 진행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열린 결말'로 작품 촬영 과정이 진행될 텐데요. 이 부분에 심사위원들도 흥미를 느끼시더라고요.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다소 불안해하시는 것 같았어요.
신지승 감독님은 마지막에 심사를 포기하겠다는 얘기로 마무리를 하셔서 아쉬웠는데요.
EIDF가 아니더라도 의미 있고 좋은 작품으로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승준 감독
두 번째는 청각장애와 시각장애를 가진 부부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담은 영화였죠.
<달팽이의 별>로 유명한 이승준 감독의 차례였습니다.
이번 작품의 제목은 <바람처럼, 예지와 나>였는데요.
태어나면서부터 시각과 청각 모두를 잃은 열여덟 살 소녀 예지와 예지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었습니다.
예지의 과거는 사진과 어머니의 나레이션 등으로 담고
천천히 변화해가는 현재의 예지는 예지의 일상을 담은 장면들
그리고 어머니와 예지의 학교 선생님이 빼곡히 기록한 일기를 활용하겠다는 점도 매우 매력적이었어요.
예지가 밥을 먹는 장면에서는 숟가락을 쥐려 하지 않는 예지의 손을 찍는 다든지 하는 식으로
영상이 스토리의 포인트를 짚도록 연출하는 실력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짧은 트레일러만 보아도 감독의 의도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가슴 깊이 파고들더라고요.
심사위원들은 너무 어두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만
이승준 감독님은 밝은 내용도 충분히 포함될 것이며,
지원이 결정된다면 애니메이션을 적극 활용해 전체적으로 판타지 같은 밝은 분위기를 더할 것이라는 계획도 밝혔습니다.
저는 이번 피칭 중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았던 작품이었기 때문에 작품이 개봉하면 꼭 영화관을 찾아 관람하고 싶어요.
안재민 감독
세 번째는 <오백 년의 약속>으로 종가의 종손과 종부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었어요.
이 다큐의 주인공은 95세의 권기선 종부와 그녀의 아들인 70세 이준교 종손으로
어른을 위한 느린 동화를 표방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영상 촬영 외에도 별도로 포토그래퍼가 스틸 컷을 찍고 있고
그것을 활용해 또 다른 스토리텔링을 할 계획도 갖고 계신다고 하셨는데요.
영상미는 뛰어날 것 같지만 저는 아직 20대라 젊어서 그런지 느린 화면에 별다른 매력이 느껴지지는 않더라고요.
제 또래보다는, 정말 인생을 좀 살아보신 4,50대의 어른들이 옛 생각도 하면서 보시면 공감하실 것 같기는 했습니다.
박혁지 감독
네 번째 작품은 <춘희막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는데요.
제목이 무슨 뜻인가 궁금했었는데 춘희, 막이는 바로 주인공인 두 할머님의 성함이었어요.
생각해보니 언젠가 TV에서인지 신문에서인지 두 분의 사연을 들은 것 같더군요.
두 할머니는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남편의 본처와 첩으로 각각 슬하에 딸 둘, 아들 둘 딸 하나가 있으세요.
지능이 좀 떨어지는 춘희 할머니는 큰할머니(막이)가 아들을 못 낳아서 본인이 직접 옆 마을에서 데려온 첩이에요.
감독님은 스스로 이 작품의 장점을 분명한 캐릭터와 유머로 꼽으셨는데요.
실제로 트레일러를 보는 짧은 시간에도 두 할머니의 캐릭터가 확실하게 구분되어 더 재미있었어요.
저는 큰할머니가 작은할머니에 대한 걱정 반 나무람 반으로 "아이고 여자여~ 여자여~"하고 탄식하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내가 죽으면 저 사람이 어떻게 사나 하고 걱정하는 부분도 잔잔한 감동이었고요.
이창준 감독
마지막 작품은 <영등포 역전을 돌아서면... 그 동네, 안동네>라는 작품인데
영등포역 근처의 노숙자 쪽방 촌과 그곳에 사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짧은 영상임에도 화면에서 등장인물들이 인생과 지금의 쉽지 않은 일상이 그대로 풍겨나와
감독이 그 동네에 들어가 섞이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촬영을 하는게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그대로 느껴지더라고요.
하지만 그때문에 작품이 완성된다면 아마 세 인물들에 대한 이입과 몰입도가 깊은 작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종 선정작은 제9회 EIDF 시상식이 열리는 8월 24일에 발표된다고 하는데요.
저는 <바람처럼, 예지와 나> 그리고 <춘희막이>의 선정을 예상해 봅니다. 결과는 내일이면 알 수 있겠네요.
피칭 자리에 함께 앉아서 촬영지 주변에 집을 구해서 살다시피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인물들과 라포(신뢰)를 형성하려 애쓰고, 먼 거리를 수십 차례 왔다갔다하며,
몇 년에 걸쳐 오랜 촬영을 반복하고, 또 동시에 제작비 지원을 받기 위한 경쟁에도 나서야 하는 감독들을 보면서.
'어딜가나 세상사는 것은 참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좋은 작품을 만들고 보이기 위한 그들의 치열함이 감사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내년 여름과 가을 사이 제10회 EBS국제다큐영화제에 찾아올 좋은 작품도 설렘으로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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