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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m/Journalist

명배우 그리던 붓으로 마을 풍경 담네

[단비인터뷰] 영화관 ‘간판화가’로 전성기 누린 백춘태 화백

 

신은정 기자

 

가로세로가 각각 60~70센티미터(cm) 가량인 대형 나무팔레트 위에 흰색, 노란색, 주황색, 빨강색, 암적색, 검정색 등의 에나멜페인트 통 10여개가 놓여 있다. 목장갑을 낀 손에 길이 30cm, 너비 6cm 가량의 붓을 움켜쥐고 흰색, 진녹색, 주황색 페인트를 조금씩 덜어 팔레트에서 섞자 금세 에메랄드빛(녹색)이 만들어진다.

 

   
▲ 백 화백이 벽화를 그릴 때 사용하는 페인트와 파렛트. ⓒ 신은정

붓질 몇 번 만에 바위 위에 수풀이 생기고 계곡에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진다. 작업 중인 벽화주변을 맴돌던 동네 꼬마가 “나도 하고 싶어...”라며 칭얼대자 “옷에 (페인트) 묻는다”고 인자한 웃음으로 달래던 노(老)화가는 제자를 보자 엄한 표정에 단호한 목소리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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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화를 그리고 싶은 아이가 몰래 붓을 만지고 있다. ⓒ 신은정

“이틀이 걸려도 좋으니까 다시 고치지 않을 정도로 해. 자세가 나쁘면 안 된다고 했지! 앉아서 하라니까. 항상 붓 뒤를 잡으라고 했지!”

 

지난 5월 18일 충북 단양의 단양군청 외벽 벽화작업에 열중하던 백춘태(70) 화백의 모습이다. 40여년간 서울 단성사와 국도극장, 대한극장 등 주요 영화관에서 간판을 그렸던 백 화백은 멀티플렉스(다중상영관)가 일반화되고 영화관에 간판대신 사진이 걸리게 되면서 지난 2000년 서울생활을 접고 단양군 가곡면 가대1리로 아내 김병복(66)씨와 함께 귀촌했다. 그리고 마을 벽화를 그리는 화가로 변신했다. 지난 17일 등 두 차례 이뤄진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백 화백은 40여년의 ‘간판쟁이’ 인생과 지역공동체 화가로서의 새 삶을 담담하게 털어 놓았다.

 

   
▲ 단양풍경을 담은 자신의 벽화 앞에 선 백 화백. ⓒ 신은정

전쟁 직전 탈북한 뒤 그림만 따라 살아온 인생

 

“한겨울이었어. 피난통이라 아버지가 노트를 어렵게 구해주셨거든. 그 노트에 공부는 안하고 그림만 그려서 ‘야 이놈아’ 하고 쫓겨났어. 장남 걱정이 되신 어머니가 나를 찾아 나섰는데 따뜻한 굴뚝에 기대앉아가지고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더래.”

 

1943년 황해도 수안면 하오리에서 태어난 백 화백은 1950년 6‧25전쟁 발발 직전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간 뒤 전쟁통에 제주도로,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다녔다.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부산 봉래국민(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고 한다.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 송도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미술교사였던 화가 황추(1924~1994) 선생의 눈에 띄어 1학년 때부터 미술부 활동을 하게 됐다. 각종 미술대회 입상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특기생이 됐고 인천 송도고등학교 시절엔 학비, 교과서, 미술용품 구입비 등을 지원받았다. 홍익대학교의 전국사생대회에 가작으로 입상하면서 무시험 장학생으로 진학할 자격을 얻었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몇 년을 앓다 돌아가셔서 집안 재산을 탕진했어. 60년대는 전부 다 굶고 살던 시절 아니야? 내가 실질적 가장이라 어디 가서 고구마 값이라도 벌어야 했어. 그길로 극장에 들어가 번 돈이 한 달에 800원 이었지. 지금으로 하면 쌀 한말 값쯤 될 거야. 그것도 줄 때는 받고 안 줄때는 못 받았지. 그 시절에 하도 고구마를 많이 먹어서 지금도 고구마는 냄새도 맡기 싫어. 아내랑 결혼하기 전에 친구랑 간판 그리며 같이 살았는데 매번 고구마로 끼니를 때웠거든.” 

 

인천극장에서 보조화가로 일하던 백 화백은 실력을 쌓기 위해 인천 키네마극장을 찾아갔다. 키네마극장이 서울에서 실력 있는 화가 백영일씨를 스카웃해 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백영일 화백은 그에게 “그림 말고 잘하는 게 뭐냐”며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그가 맘보춤을 추자 다음 날부터 일하자고 하더란다. 그는 스승 백영일 화백 밑에서 개봉 영화의 거리포스터를 그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내공을 쌓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22살 무렵, 그는 무작정 서울로 갔다. 명동 중앙극장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근무할 수 있게 됐고 얼마 후 관객 수로 A등급이었던 종로3가의 단성사로 스카우트됐다. 군 복무기간 3년을 강원도 원주 군인극장에서 간판을 그린 뒤 제대 후 다시 단성사로 복귀했다. 당시 충무로 영화계에는 ‘백춘태가 간판을 그리면 영화가 흥행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백 화백은 회고했다. 

 

   
▲ 휴식 중에도 벽화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 얘기를 나누는 백 화백. ⓒ 신은정

영화 주인공처럼 화려했던 나날들

 

입소문을 탄 백 화백의 간판은 대한극장, 서울극장, 아세아극장 등 대부분의 개봉관에 걸렸다. 그 때는 연예인도 홍보수단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간판에 자기를 제일 크게 그려달라며 매니저 편에 영화배우 등이 봉투를 보내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1980년대 초 미국 담배회사 말보로는 월 2000달러와 숙식제공을 조건으로 백 화백에게 미국으로 와 광고간판을 제작해 달라고 제의하기도 했다.

 

“어마어마한 돈이었지. 그래도 그때는 종로 3가 단성사를 떠나기가 싫더라고. 며칠을 고민을 했어. 술도 많이 먹고. 그때 갔더라면 외국사람 다 됐겠지.”(웃음)

 

간판에 대한 애정은 그를 한국에 남게 했다. 그리고 1978년 ‘단성기획’을 세워 간판작업을 기업화했다. 

 

“그때는 돈만 있으면 극장을 운영했던 시절이고, 극장의 과장이나 부장은 극장 앞에서 구두 닦다가 지배인 심부름 잘 해서 되는 경우도 많았거든. 돈밖에 모르고 막말하는 무식한 사람들한테 우리 같은 간판장이들이 그림을 평가 받아야 하는 게 제일 고통스럽고 힘들었어. 그래서 그 사람들 이기려고 단성기획을 차렸지. 직원 20명 두고 사장이라고 불러달라고 하고, 기사 두고 까만 세단 끌고 다녔더니 그제야 함부로 하는 유치한 버릇이 없어지더라고.”

 

백 화백은 직원들의 처우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일단 일을 시키고 영화간판 하나가 완성되면 나중에 돈을 주는 도급제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백 화백은 월급제로 임금을 지불했다. 명절에는 상여금을, 결혼하는 직원에게는 결혼식 지원금을, 휴가 때는 휴가비를 따로 주었다. 이는 간판업계에 큰 충격과 화제를 불러왔다. 

 

당시 단성기획은 서울시 개봉관 중 단성사, 서울극장, 아세아극장, 국도극장, 대한극장, 시티극장 등 6개 개봉관의 간판을 독점하며 승승장구했다. 극장 간판 외에 옥외 간판이나 쇼윈도 디스플레이, 매장 인테리어까지 하며 명성을 떨쳤지만 대금으로 받은 어음들이 1990년 초에 대거 부도가 나면서 문을 닫게 됐다. 이후 다시 태성기획을 차려 영화간판만 그렸지만 멀티플렉스 활성화 등과 함께 사업이 기울어 결국 2000년에 서울생활을 정리했다.

 

   
▲ 단성사 폐관 전 이 간판을 올리며 울었다고 했다. ⓒ 신은정

단양에서 찾은 새로운 인생

 

아내와 함께 단양에서 새 삶을 시작한 백 화백은 지역공동체 이곳저곳에서 새로운 일을 맡았다. 예술관련 인프라가 부족했던 단양군에서는 지역아동센터에 백 화백을 미술선생님으로 초빙했다. 백 화백은 초‧중등학생들에게 수채화, 정물화, 풍경화 등을 가르쳤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가대1리 노인회 총무도 맡았다. 단양군이 노인들의 여가생활을 돕고 소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시행한 ‘돈 버는 웰빙 경로당’ 사업 중 양봉사업을 맡아 첫 해에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단양군의 요청으로 상진대교와 고수동굴 부근 200m 정도 되는 벽에 단양팔경 등 다양한 그림을 그리게 됐고 지금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벽화를 그리는 일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고 그는 털어 놓았다.

 

   
▲ 백 화백의 단양 자택 전경. ⓒ 신은정

“간판은 한번 그리고 나면 다음 영화를 걸때 그 위에 흰 칠을 하고 다시 그려. 그래서 남은  작품이 없어 아쉬울 때가 많았지. 벽화는 그보다는 수명이 길어 좋긴 한데, 건축용 도장에 쓰이는 에나멜로 그리다보니 비가 오거나 하면 수명에 한계가 있어. 그러면 관청 결정에 따라 다시 그리든지 그리지 않든지 하게 돼. 옛날 일은 다 잊어버려야 되는데, 서울서 받던 대우와 비교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림 하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대접은 받고 싶은데 워낙 박봉이라......”

 

하지만 백 화백은 화가가 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고, 지금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만일 자신이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면 몇 명 남지 않은 제자들이 그리고 있는 대형 트릭아트(착시현상을 활용해 관람객이 보고, 만지고, 작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림)를 자신도 그리고 있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백 화백이 지난 2012년 서울 세종로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의뢰로 그린 서편제, 고래사냥 등 6편의 극장 간판은 박물관 상설전시실에 전시되어있다. 같은 해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간판의 역사와 백 화백의 인생을 담아 <근현대 직업인 생애사>를 발간하기도 했다. 두 박물관에서는 백 화백이 소장한 과거 간판 사진을 촬영해 자료화하기도 했으니 대한민국 문화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장식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수많은 작품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간판으로 ‘서편제’를 꼽았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간판작품.  ⓒ 신은정

 

“서편제는 장장 6개월을 상영했어. 영화를 오래 상영하다보니 간판이 퇴색이 돼 2번을 그렸어. 당시에 한국영화로 최다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이기도 하고. 지금도 제일 기억에 남아”

 

오랜 세월 그림을 그려왔는데 아직도 그리고 싶은 것이 있냐는 질문은 백 화백은 너무나 쉽게 대답했다.

 

“극장 간판이겠지. 기회가 있다면 또 한 번......”

 

   

▲ 백 화백의 방 안 미술도구. ⓒ 신은정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